소아마비로 인해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밖에 없었고, 집이 시골이라 학교까지 휠체어로 통학할 수 없어서 초등학교도 못가봤지만, 아래아한글 개발자를 떠올릴 때 항상 그를 떠올리게 됩니다. 광주에서 태어난 정내권 님은 하루 종일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18세 되던 해에 우연히 대우전자 8비트 컴퓨터 광고를 보게 됩니다. 그 광고를 보고 컴퓨터 잡지 한 권을 사서 마르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을 졸라 컴퓨터를 한대 장만한 후 컴퓨터에 몰입하기 시작합니다. 2년 뒤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컴퓨터 잡지에 기술 원고를 쓰는 전문가로 거듭납니다.

1980년 후반 PC통신으로 알게된 박흥호 님(훗날 나모인터랙티브 설립)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하여  공병우 박사가 설립한 한글 문화원에 합류합니다. 그곳에서 공병우 박사님이 설계한 세벌식 자판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한글문화원에서 운명의 단짝 이찬진 님(훗날 한글과컴퓨터 설립)을 만나게 되고, 이찬진 님과 함께 도스용 한글부터 한글 2002까지 개발합니다. 정내권님은 박흥호님이 만든 '한글문화원 맞춤법 교정기'를 이준희님과 완성시킵니다. 이 프로그램은 아래아한글 1.2 특별판에 적용됩니다.

이찬진님이 한컴 대표직을 그만두고 드림위즈를 창업할 때 그와 함께 있었고, 이후 드림 어플라이언스를 설립하여 모바일소프트웨어 개발사 대표가 됩니다. 2008년에는 실리콘밸리로 이민을 와서 여러가지 기업용 이메일 소프트웨어 등을 개발합니다.

그의 코드에 대해 "주먹구구식 소스 개발"이라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지만, 정내권님은 워디안 개발을 기획부터 완성까지 2년간 전력을 다하는 뚝심형 개발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척박해도 꿈까지 작아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젊은 친구들이 만드는 제품을 보면, 거기에 담긴 꿈의 사이즈가 참 현실적이에요. 작다는 겁니다. 크게 꿈꾸면 크게 다칠까봐 그렇겠지요. 워낙 현실이 척박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시시하게 출발해도 최종목표는 거대해야 합니다. 왜냐면 잠재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드는 서비스나 제품을 쓸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그런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아한글포기 선언 이후 쏟아진 사용자들의 비판 가운데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가슴을 뜨끔하게 하는 지적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컴이 이렇게 된 원인을 불법복제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법복제가 국내 소프트웨어산업 성장을 가로막는 토양적 문제가 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보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큰 시장이 형성되고 많은 인재가 뛰어들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1천년에 변하지 않을 것은 우리말입니다. 우리말과 한글이라고 하는 문자체계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웃집 아저씨가 어떤 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미친개(mad dog)'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존 홀(Jon Hall)의 어린 시절, 옆집에는 은퇴한 아저씨 미스터 그룸(Mr.Groom)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룸 아저씨의 지하실에는 주크박스, 시계, 라디오 등 온갖 전자제품으로 가득차 있었죠. 그는 각종 전자기기를 모으 수리하는게 취미였습니다. 마법같은 공간을 좋아하던 존 홀은 Popular Science, Popular Mechanics, Popular Elecronics 같은 잡지를 읽게 되고, 드렉셀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합니다.

전기 공학을 공부하던 그는 실습과정중 사고로 감전될 뻔한 위험한 순간을 겪습니다. 이를 계기로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는 것'이상의 신체적인 위험이 없이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전기에너지가 논리적인 결과물로 바뀔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대학에서 데이터 처리로 전공을 변경하고, 당시로서는 매우 생소했던 컴파일러 이론과 어셈블리어를 공부합니다.

존 홀은 드렉셀 대학에서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공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DECUS(DEC 장비 사용자 모임)에 참여하게 되고, 여기에서 자유 소프트웨어의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소스코드를 살펴보면서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아보는 것을 좋아했고, 다른 사람이 보내준 코드의 버그도 수정하게 됩니다. 당시 DECUS에서 리누스 토발즈를 만나고, 토발즈가 리눅스를 DEC 알파용으로 포팅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DEC 알파 아키텍처에 이식된 리눅스는 알파 아키텍처의 우수한 연산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고성능 컴퓨팅 및 서버 애플리케이션 분야에 리눅스가 도입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존 홀은 현대 클라우드 환경에서도 성능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상머신과 에뮬레이터가 보편화되었지만, 결국 로레벨로 가면 하드웨어가 명령어를 처리하는 것이기에 코드 한 줄을 줄이는 것이 구글 데이터센터의 서버 수천대를 절약하거나 배터리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존 홀은 벨 연구소를 비롯하여 DEC, VA Linux, SGI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한때 하트퍼드 기술대학의 전산과 학과장으로 재직했는데, 이때 학생들로 부터 '미친개'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 별명에 대해 존 홀은 "한 때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던 시절, 화를 폭발적으로 냈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결국 논쟁에서 지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매일, 매순간 화를 내지 않도록 스스로 상기하기 위해 그 별명을 계속 사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존 홀은 USENIX 협회를 비롯한 여러 비영리 단체에서 활동해 왔습니다. 2015년 9월에는 리눅스 전문가 협회(Linux Professional Institute) 이사회에 합류했습니다. 존은 유료 운영체제인 디지털 유닉스를 판매하면서도 무료인 리눅스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다녔는데요. 리눅스를 경험한 사용자들이 결국 고성능이 필요해지면 디지털 유닉스와 알파 장비를 구매하게 된다는 논리로 경영진을 설득했습니다. 리눅스가 비즈니스 운영체제로 성공할 것임을 확신하고 전문적인 인력 양성을 위해 LI(리눅스 인터네셔널)을 설립하고, LPI를 통해 자격 인증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존 홀의 삶은 오픈소스 운동에 대한 헌신으로 일관되었는데요. 리눅스 프로 매거진의 필진으로도 활동하기도 했고, 자유, 협업, 투명성이라는 원칙이 오픈소스 운동의 원칙으로 자리잡는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최근에는 Caua 프로젝트의 의장으로, 오픈소스 하드웨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우아 프로젝트는 브라질에서 첨단 기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프로젝트입니다.

그는 뉴 햄프셔에 거주하는데, 그의 자동차 번호판은 UNIX 입니다. 미국 뉴 햄프셔 주의 모토는 "Live Free Or Die" 입니다. 리눅스의 모토와 잘 어울리지 않나요?

 

 

존 홀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그레이스 호퍼라고 합니다.


저는 일을 끝내는 걸 좋아합니다

 

자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모든 사람은 저마다 흥미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쉽고, 찡그리는 것보다 웃는 것이 쉽습니다.

 

한국의 리눅스 커뮤니티가 이렇게 폭넓게 발전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더 큰 발전을 위해서는 표준을 개발하는데 주력해 주세요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필요해서 만든 코드가 가장 훌륭한 품질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열정이야 말로 소프트웨어 발전의 핵심 동력입니다.

 

첫번째,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세요. 하루 8시간 이상, 편생을 바쳐야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면 그것은 고문에 불과하지만, 열정을 가진 일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두번째,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세요.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중 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배움을 멈추는 순간 퇴보가 시작합니다. 대학교육의 본질은 특정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법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 있습니다. 기술이 변해도 근본적인 학습 능력만 있다면 어떠한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타인과 협력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두려움때문에 질문이나 대화를 주저하지 마세요. 신념이 있다면 과감하게 행동하세요.

 

 

 

 

한글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는 프로그램하면  한글과컴퓨터사의 아래아 한글을 떠올릴텐데요. 사실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아래아한글이 아닌 한글프로세스3(이후 사임당 워드)입니다. 무려 애플컴퓨터에서 실행되던 워드프로세서인데요. 이 워드 프로세서를 만든 분이 바로 강태진님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로 이민간 소년 강태진은 토론토 대학을 마치고 1982년 한국에서 3개월 머무르게 됩니다. 한국과학재단에서 운영한, 교포 학생을 우리나라 회사의 인턴으로 초대하는 프로그램에 선발됩니다. 강태진님은  3달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국의 현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 애플 컴퓨터(카피컴퓨터 포함)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지만 애플 운영체제에서 동작하는 한글 소프트웨어는 하나도 없었죠. 인턴십 프로그램으로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동창과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하고, 1983년 한글전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합니다.

강태진님은 원래 박사 과정을 준비중이었다고 합니다. (자네 대학원에 관심있나?) 토론토대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중 미국방부 전산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하여 1983년 휴학하고 한컴퓨터인스티튜드를 설립합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외부적 상황때문에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운명처럼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한국인 부자였던 TeleVideo사의 필립황으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필립은 미니컴퓨터를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그를 만난 강태진은 학자 대신 사업가의 꿈을 꾸게 됩니다.

88년 외교관이었던 장인의 권유로 다시 한국을 찾았고, IBM용 첫 한글워드 프로세스인 한글 2000(이후 사임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개발하여 판매합니다.  한컴퓨터연구소를 한국에 설립한 다음 처음으로 채용한 아르바이트생이 바로 이찬진 한글과 컴퓨터 대표입니다.  이찬진님은 당시 군미필이었는데, 제대후 한글과컴퓨터를 설립했고,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임당 워드가 기억에 남습니다. 가변 크기 글꼴을 지원하는 최초의 그래픽워드프로세서였습니다. 처음에는 비트맵 글꼴이라 글씨 크기를 키우면 엄청난 계단이 생겼던 기억이 있네요. 잉크젯 프린터기인 HP Deskjet 500 시리즈를 사면 사임당을 번들링해주었습니다.

강태진님은 1994년 한컴의 경쟁사였던 한메컴퓨터, 휴먼컴퓨터, 문방사우, 21세기 워드프로세스(이스트소프트)를 합쳐 나라소프트를 설립하고 '파피루스'라는 윈도우용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였지만,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나라컴퓨터는 한컴에 인수됩니다.

이후 한컴에서 독립한 강태진은 자바 기반의 오피스 소프트웨어인 씽크프리를 설립합니다. 씽크프리가 투자받는 과정에서 자바를 만든 제임스고슬링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씽크프리는 혁신적이었지만, 미국의 인프라 미비로 성공하지 못하고(초고속 인터넷은 대한민국, 인프라강국), 다시 한번 한컴에 인수됩니다. 두번째 한컴으로의 인수합병이죠. 씽크프리는 한때 마이크로소프트 CEO 스티브 발머가 리눅스 다음의 잠재 위협으로 지목할 정도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강태진님은 KT, 삼성 등에서 여러 서비스 개발을 진두지휘합니다. 강태진님은 <내사랑 내사업 내방식대로>와 <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목표가 돈이였던 적은 한번도 없다. 돈을 엄청나게 벌기위해 하는게 아니라, 재미있어 하는 거다. 하지만 재미만 가지고 하면 쉽게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재미만 가지고 하면 흔들리기 쉬운데, 내가 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단순 재미가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에, 세상에 뭔가 기여한다고 생각하면 장거리를 갈 수 있다.

 

세계 시장과 세계 유저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돼 장소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언제나 시장은 세계를 타깃으로 해야 한다. 또 남들이 다 하는것, 이미 트렌드가 된 것, 이런걸 쫒으면 안된다. 그러면 너무 늦다. 너무 앞서가도 안된다. 반발자국만 빨라야 한다.

 

의도적으로는 못한다. 우연히 했는데 반발자국 이였다, 이러려면 언제나 남들보다 트렌드를 빨리 캐치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한국만 보면 안된다.

 

아직 우리 소프트웨어 산업은 대부분 모방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처럼 철저한 모방을 거쳐 창조의 단계로 들어서려면 소프트웨어 산업의 저변확대와 특히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1993년)

 


 

 

내사랑 내사업 내방식대로 | 강태진 - 교보문고

내사랑 내사업 내방식대로 |

product.kyobobook.co.kr

 

 

+ Recent posts